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deerball8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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사랑 호르몬

사랑하면 도파민, 옥시토신, 엔도르핀, 페닐에틸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된다. 이 신경전달물질이 사랑의 본질이라니

허무하기도 하고, 경이롭기도 하다. 이미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, 이 4가지 호르몬의 유효기간은 대략 2년이란다.



어제 잠이 안 들어서 오스카 씨와 이런저런 새벽 담소를 나눴다. 대화 주제는 섹스에 관한 것이었는데, 마지막 결론은

연인이 아니어도 한 사람과 고정적으로 섹스하면 상대방에게 쉽게 빠져버린다는 것이었다. 어쨌든, 내가 열띠게 주장한

옥시토신은 성욕을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으로, 사랑을 기반으로 형성한 연인이 아니더라도 친밀한 누군가에게 느낄 수

있다고 본다.



몇 년 전, '사랑이 아니라 욕망'이라고 쓴 칼럼이 있다. 그 글에 역설을 말하려는 건 아닌데 아이러니가 느껴질 것 같다.

결국, 우리는 왜 사랑 따위나 그 전철을 느끼는 걸까?



어릴 적 좋아했던 스터디 선생님에게는 도파민 호르몬이 먼저 전달되지 않았을까? 그는 나의 감정은 단순히 도파민 호르

몬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다. "너는 화학적인 활동 때문에 나를 좋아한다고 느끼는 것뿐이야.", 뭐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던

것 같다. 어쨌든, 처음에는 플라토닉한 막연한 흠모였다. 책, 샤프, 지우개 틈에서 내 마음에 들어온 건 그 선생님의 하얀 팔

뚝이 아니라, 그의 지적인 면모였다(지적인 남자는 내 이상형 중 하나다). 그와 종국에는 플라토닉이 아닌 에로스를 맞이했

지만 말이다. 페닐에틸아민 전달되고, 시간을 함께하며 엔도르핀이 전달됐기에 우리는 첫날밤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?

내가 그를 좋아했던 건 도파민의 귀여운 사랑만으로는 지속이 안 됐을 것 같다. 어느 순간 그가 원했듯이 나도 그의 육체를

탐했으니까. 성욕을 이끄는 호르몬들이 전달되면서 더욱 나의 어릴 적 풋사랑은 가속도를 밟았던 것 아닐까?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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오스카 씨와 새벽에 나눴던 대화에서, 나는 누군가에게 빠지는 것이 싫어서 한 남자만 고정적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.

누군가를 만나고, 섹스하면 분명히 옥시토신이 넘쳐서 며칠 동안 멍청한 감정에 휩싸일 거라고. 그래서 차라리 호르몬을 분산

시킬 수 있게 두 명 이상을 만난다고 했다. 나는 나 자신을 호르몬 장난 속에서 멍청하게 사랑에 빠지는 상태로 두고 싶지 않

으니까 말이다.



누구나 친밀한 순간에는 사랑 호르몬을 느낀다. 하지만 호르몬은 호르몬일 뿐. 관계가 이루는 바탕이나 향신료일 뿐, 관계

자체가 될 수 없다. 그래서 나는 사랑 호르몬을 신뢰하지 않는다. 자주 옥시토신과 페닐에틸아민 따위가 전달된다. 호르몬은

순간의 기쁨에서 나중에는 대상에 연연하는 것으로 변화된다.



섹스 용품 , 스터디 선생님과 이별했던 비참함에 교훈을 얻은 것일까? 나는 감정을 단백질 활동 따위로 치부했던 스터디 선생님을 닮아가는 거 아닐까? 나는 언제까지 호르몬을 배척할까? 호르몬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인정할 때까지 아마 나는 이대로 지낼 것 같다. anyway, 나는 호르몬이 느끼게 하는 순간적 쾌락이 좋으니까.